중기단법 후편 승단기 - 한경애 200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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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거장 앞을 지날 때마다 국선도라고 쓰인 건물 외벽을 무심, 유심히 바라보다가 정작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은 지난 여름이다. 전에 다니던 헬스장이 봄에 문을 닫았다.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어깨 결림과 소화불량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 때문에 다른 헬스장을 찾아 나섰다가 헬스장의 답답하고 시끄러운 실내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국선도장을 찾은 것이다. 우습지만 나름대로는 간절한 이유로 국선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마음 편안한 여유와 고요함을 매일 맛보는 지금 생각해보면 제대로 찾아간 것이다. 다음날 남편과 저녁 산책을 하다가 다시 수련장에 올라가 등록을 하고, 한달 쯤 지난 다음에는 친구와 아들도 같이 다니기 시작해서 벌써 겨울이다.
수련을 시작하고 몇 달 사이,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 마음이 여유로워졌다고 느낀다. 감정의 기복도 적어지고 튕기듯이 반응하는 신경질적인 생활태도도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 전에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질책도 하다가 갑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혼자 잘난 체 하기도 했다. 이제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의 방향이 바뀌면서 내 스스로에게 관대해졌다.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해지고 있는지, 나의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을 조금이라도 덜 하는지, 이것은 말하기 어렵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늘어난 것도 수련의 덕분이라 생각한다. 하늘 기운을, 마음의 고요를 조금씩이라도 매일 복용(!)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을 자주 듣고, 내 자신이 몸이 가볍다고 느낀다. 밥도 맛있게 잘 먹고 잠도 달게 잔다. 말할 수 없이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의 허상을 지고 다니면서 신경성, 알레르기성 질환의 집합체가 되어버린 몸. 내 몸이 이렇게 애쓰느라 뻣뻣하게 굳어있는지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하고 내팽개쳐진 몸이 이만한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마음이 편안한 것에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을 보니 아직도 몸을 경시하는 습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나보다. 수련을 시작한 후 두어 번 심하게 아프기도 했다. 기운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밥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고 나면 예전처럼 숨이 목에 걸리는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한 번 심은 씨앗이 어디로 가랴, 하는 자신감으로 몸을 돌보니 회복도 빠른 것 같다. 몸이 아파도 전처럼 걱정하고 짜증스럽기보다는 이왕 앓는 것 잘 앓아보자는 뱃장이 생겼다.
이번에 승단심사를 받으리라는 것을 알게된 다음날,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잡생각에 빠져 잘난 체 하며 마음이 제멋대로 허우적거리다보니 준비 운동을 하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럿이 이루고 있는 하나에서 혼자 빠져나와서 들썩거리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혼자 부끄러웠다. 그런데 앞에 계신 도반님의 희고 빳빳한 띠가 눈에 들어왔다. 아, 나도 다시 빳빳한 띠를 매겠구나, 하면서 마음이 다시 푸근해 졌다.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승단을 하라 하시는 큰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도 사라졌다. 처음에 입단 행공 동작을 따라하면서 갓 입학한 초등학생이 운동장에서 유희하는 것 같다는 기분으로 즐겁던 마음이 되돌아왔다. 여러 색의 띠를 볼 때면, 특히 빛 바랜 도복과 띠를 볼 때면 부럽기보다는 왠지 숙연해진다. 아무래도 나는 즐거운 초등 1학년생이 적성에 맞는가보다.
여러 해째 끌고있는 논문을 마무리 지으려하는 지금. 하루에 한 번 도장에 가 있는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책상머리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인 몸을 구석구석 돌보기도 하지만 긴장을 풀고 잠도 많이 잔다. 아마 유난히 자주 자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도 신발장 위에 쓰인 것처럼 세상일을 잠시 내려놓고, 탈의실에 쓰인 것처럼 다른 모든 사람과 생명체의 도움을 다시 느끼고 감사하면서 나를 낮추고 다시 되돌아보는 이 시간은 온전히 내 시간이다. 여럿과 함께하는, 하늘과 하나되고자 하는 나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처음으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주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느껴본 고마운 시간과 공간을 함께 누리도록 도와주시는 두 분 사범님과 여러 도반님들, 남편과 아이, 지금의 내가 있게 해주신 모든 생명, 무생명체에게 감사드린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오직 감사만이 내 몫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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