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단법 수련기 - 김두연 200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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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2000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과감하게 그만 두었다. 주위사람들은 한창 좋은 위치에서 왜 그만두느냐, 그만한 직장이 흔한 줄 아느냐, 등의 만류가 많았지만, 이미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마당에서 더 이상 기약없는 미래를 붙들고 불안한 줄타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거대하지만 불확실한 조직보다는, 미약하지만 확실한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퇴직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단식원이었다. 나를 새롭게 정비하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몸안에 축적되어 있던 지방 덩어리며 노폐물, 담배로 인한 니코틴과 타르, 그리고 잘못된 습관과 인식체계까지도 모두 들어내 버리는 기분으로 1주일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날들을 부대끼며 살아 왔던가? 나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의해 살아온 나날이었다. 가정보다 직장을 우선시하며 정신없이 보내온 시간들이었다. 마흔을 훌쩍 넘기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허허롭기 짝이 없었다. 선배들은 이미 상당수가 밀려나 있었고 후배들은 좌절하고 있었다. 나도 빠른 속도로 선배들 뒤를 따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더 늦기전에 결정을 하자!
단식원에서의 행복한 1주일을 보내고 난 뒤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이제는 주어진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은 없어졌고 중요하지 않은 회의나 보고서 작성 등으로 빼앗기는 시간도 없어졌지만, 1인 경영시스템에 의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추진해야 하는 고독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도전이었고 또 다른 스트레스였다. 그로부터 2년, 짧은 단식기간에 빠진 체중은 보란 듯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한동안 끊었던 담배도 어느샌가 내 손에 끼워져 있었다. 초심은 오간데 없이 나는 빠르게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대망의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 새해를 두 달 정도 남겨놓은 시점에서 양지 수련원을 찾았다. 새해에는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뵙는 원장님의 맑은 얼굴에서 만만찮은 공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얼굴이 참 맑은 분이구나, 듣자하니 오랫동안 공직에 몸 담으셨다던데, 어쩌면 저렇게 동안(童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많은 도반님들이 느꼈을 이러한 느낌은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왔으며, 주저없이 국선도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도장에 들어올 때나 나갈 때, 또 수련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의 국기를 향해서 인사하는 예법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음을 모아서 자연스레 준비가 되는 것도 좋았지만, 황사바람이 지독한 어느 봄날 오후, 초등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려져 텅 빈 운동장에서 홀로 황사를 뒤집어 쓰고 걸려있는 태극기가 안쓰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수련장에 있는 태극기는 그나마 대접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였다.
어쨌거나 잠시나마 국기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 훈(訓)을 따라 읽을 때, 경건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도반 상호간에 합장하는 인사법도 따뜻하고 의미있게 다가왔다. 사회생활 하면서 얼마나 건성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살아왔던가? 의미없이 악수를 주고 받는 서양식 인사보다, 잠시나마 손을 모으고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는 우리 고유의 인사법이 제대로 된 인사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준비운동을 할 때는 뼈와 근육이 너무 굳었는지 뿌드득 소리가 나는 것 같았고, 마치 통나무처럼 딱딱한 내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온 도반님들은 참 유연하게 잘도 하신다. 다리가 일자로 쫙 벌어진다든지, 허리가 거의 바닥에 닿는 분도 계셨다. 엄메 기죽어!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준비운동이 끝나고 행공에 들어갈 때 처음 며칠간은 중기단법의 자세도 배우기 전이라 막연히 누워있자니 나도 모르게 잠이 왔다. 아마 틀림없이 코까지 골았으리라. 1주일 정도 지나고 행공 자세를 하나씩 배워가면서 이제 졸음은 오지 않고 숨도 좀 더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중기단법 전편을 순서대로 따라 하면서 비교적 편안하게 호흡을 하는 편이지만, 처음 한,두 달간은 청산 선사님의 구령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해서 애를 먹었다. 그저 옆의 도반님을 힐끗거리면서 하는대로 흉내만 냈었다.
3개월까지는 마치 의무처럼 마지못해 수련장에 나오곤 했었는데, 요즘은 기쁜 마음으로 나온다. 강의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지는 날들을 제외하면 가급적 수련장에 나오려고 노력한다. 수련시간만큼은 세상사에 휘둘리지 않고 나와 대화할 수 있어서 좋고, 몸도 훨씬 가뿐해진 것 같다. 그리고 수련후 도반님들과 녹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얘기들이 참 의미가 있다.
요즘은 틈 나는대로 지금 내 숨자리가 어디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조급하거나 흥분하면 숨이 위로 올라옴을 느낄 수 있다. 그때는 얼른 심호흡을 하며 숨자리를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조금전의 짜증나고 힘든 상황들이 별게 아니라는 마음이 들곤 한다. 국선도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내 마음도 그만큼 포용력이 생긴 것 같다.

2002-03-27

김 두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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